동반텍스트적 접근방식 2 : 발자크와 시간

 

         

발자크의 주제 : 시간

소설의 내적인 구성은 바로 /공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시간이란 발자크 작품 안에서 상황들을 대립시키는 수단이며, 소설적인 기술의 요소이다. 시간은 사건의 급변들을 채우고, 소설가가 사전에 에피소드들에 요구했던 똑같은 결과들을 느린 진행을 통해서 이끌어 가면서 발자크의 드라마적인 시스템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그런데『인간희극』은 아주 간접적으로만 하나의 연대기일 뿐이다. 시간은 바로 거기서 멀리서 이야기되고, 다시 사용되고, 조직된다. 인간희극에서는 시간이 자기가 생산한 모든 것들을 따라 다시 포착되고 구성되기 때문에, 역사에서 쓰는 용어를 빌리자면, “재발견”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발자크의 『인간희극』의 시간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발자크의 주제는 분명히 시간이다. 시간은 아주 새롭고 아주 뜻밖의 것을 실어 나른다. 시간은 인간들의 행로이다. 시간은 인간들에게서 나오는 것도 아니요 소설의 주인공들에게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바로 인간들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시간 속에 그럴 있을 비로소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며, 그래서 시간 속에서 자기들 존재의 심오한 이유를 찾는 것이다. 말의 전통적인 의미에서 모든 직접적인 지식은 이와는 정반대의 결과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 선적이라서 증식하지 않는, 예견가능해서 놀라움이 전혀 없는 결과. 지나가서 이미 알려진 역사에 관해서도 그렇다.

지나가서 이미 알려진 역사 안에서의 시간과 인간들의 행로를 실어 나르는 역사에서 보이는 시간은 다르다. 이렇게 고정되고 선적인 역사가들의 역사에 대한 피에르 바르베리스의 지적은 발자크의 『매춘부들의 영예와 비참Splendeurs et Misères des courtisanes』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 “역사는 주제에 입을 다무는데, 많은 혁명들의 진실 원인에 관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서술은 소설 속에서 흔히 있는 어리석음과 보조경찰의 책략을 논하고 있는 문장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이 무시해버리거나 알지 못하는 부분이 소소한 원인들의 영역 (그리고 7 왕정 하에서 모든 것은 작다 tout est petit!) 속함을 있다.

“무엇보다도 풍속의 역사가는 사실의 역사가를 지배하는 법칙보다 어려운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풍속의 역사가는 모든 것을, 비록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있을법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반면에 이른바 역사라고 하는 분야에서는 불가능한 것도 그것이 바로 일어난 것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된다. 사회적인 혹은 사적인 생활의 변천들은 모든 것에 기인하는 사소한 원인들의 세계에 의해 생겨난다”(『농민들』).

바로 여기서 소설이 역사에 개입하고 역사에 대해 말을 하도록 있고, 해야만 한다. 또한, 소설은 계속되고, 순간적인 호소들 혹은 행보의 부수 사건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진전하고 축적하는 역사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이면과 시간들의 차이를 역사가들의 역사보다 표시한다. 발자크의 소설은 인생여정들의 이질성을 시간과 그가 묘사하는 실제의 공간을 제한하는 문학의 공간에서 펼치는 동시에 강조한다. 일예를 보자면 발자크는 과거 안에 현재의 경험을 교차시킨다. 그는 『잃어버린 환상Illusions perdues』에서 화자의 입을 통해 “왕정복고가 젊은이들에게 억지로 강요한 예속”을 한탄한다. 단정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왕정복고라는 시간 밖에서 의젠느 라스티냑, 뤼시앙 뤼방프레의 의미를 찾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혹은 정확하게 그들의 진출 혹은 그들의 인생여정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바로 왕정복고라는 시간을 통해서이며, 발자크의 시대의 발자크에게 고유한 글쓰기를 통해서이다. 그들은 열린 순간에 그리고 왕정복고에 대한 발자크의 독서가 역사가들의 독서와 어떤 면에서 같지 않은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왕정복고는 신세대를 만들고, 라스티냑과 뤼방프레가 화신이 되는 젊은이를 만들고, 시대의 자유역사가들이 몰랐고, 문제의식화하지 않은 계층을 만든다. 1830 7 이후 그들은, 적어도 같은 상징적인 무게로는, 이상 가능치 않으며, 그리고 초창기의 문제의식은 깊이 있게 변형되었음을 풍속의 역사가가 주지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발자크는 소설 속에서 충돌과 모순을 가지고 현실을 살아 숨쉬게 하는 것이지, 사실의 역사가들이 하듯이 현실을 규정하거나 일어났으므로 정식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언급했던 19세기라는 문제의식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발자크는 『에브의 Une fille dÈve』의 서문(1839)에서 “당신들은 진행 중인 현재에는 적용할 없는 시스템인 지나간 시간의 역사만을 연대순으로 이야기할 있습니다. 작가는 자신 앞에 모델로서 19세기를 대하고 있습니다. 모델은 끔찍이도 야단스럽고 제자리를 찾게 하기에는 어렵습니다”라고 기술한다. 이렇게 발자크는 19세기를 하나의 거대한 움직임으로 포착하면서, 선적인 역사의 시대로 포착하기에는 불가능한 시대로 간주한다. 점은 뒤의 우리 표에서 보게 발자크의 글쓰기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특징으로 대략 1839 이후의 발자크는 “세기 포착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이고, 혹은 불가능함에 맞서 앞으로 건설하게 『인간희극』을 차근차근 소설화한다.

선적인 시간과 망의 시간

발자크는 “우리는, 우리시대에 진행되는 바를 통해서, 역사가 이루어지는 순간에조차 역사는 왜곡된다는 것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발자크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수정해서 다시 쓰는 역사를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적으로 있음직한 사실을 시간과 그의 인물들을 통해서 알려진 역사가 아닌 다른 역사를 독자들 앞에 펼쳐 보이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 『카트린느 메디시스Sur Catherine de Médicis』는 흥미롭다. 소설 안에서 현상이라는 차원에서 현재와 관계되는 과거의 차이가 관찰되며, 그래서 바로 현재와 함께 구조와 심오한 기능들의 측면에서 괄목할만한 유추가 보여진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특징적인 윤곽을 동시대의 풍습에서 다시 찾는다. 존재물과 사건들의 다양성 아래, 변하지 않는 경향들과 긴장들이 드러나서 유추는 과거의 몇몇 장면들을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서 동시대의 『인간희극』 안에 편입되도록 한다. 그러나 우리의 흥미를 끄는 점이 하나 있는데, 일명 “뜯어 맞춰진bricolé 두꺼운 텍스트『카트린느 메디시스Sur Catherine de Médicis』가 『인간희극』(18421846) 편입되는 출판과정의 복잡성이다.

이의 구체적인 예에서 보이는 바처럼『인간희극』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펴본 발자크 작품의 기본 주제인 시간이 소설적으로 다양하고 개성 있게 텍스트 안에서 제각기 펼쳐지게 하는 필수요건이라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인간희극』의 각각의 텍스트가 발자크에 의해서 쓰여지고 구성되기까지 여러 가지 외적인 힘이 중요한 방식으로 작용해 왔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실제로 발자크 글쓰기에는 작품 생산의 조건들이 수렴되는 한편 상충된 면모들의 흔적들이 남아있으며, 『인간희극』은 복잡하고 다양한 텍스트의 역사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텍스트 출판과 수용의 시기와 조건들은 시간성과의 관계에 본질적인 부분에 참여하게 된다. 이렇게 텍스트의 역사성은 가능한 주변의 모든 동반텍스트를 살펴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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